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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남해의 꽃내마을에서 아름다운
추억에 빠져보세요
꽃내마을안내

권역소개

보물섬 남해의 보물 꽃내마을에서 잊지 못할 보물들을 찾아가세요!
꽃내마을은 8개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저희 꽃내마을은 청정남해의 끝자락에 위치한 넉넉한 인심가득하고 따뜻한 꽃내마을입니다.
언제든지 오셔서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보세요

금송(金松)마을

경로당 먹거리 떨어지는 날 없는 마을
일 년 내내 삼베 짜는 부지런한 아낙네들

금송은 마을 앞산의 생김생김이 거문고 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금성(琴城)이라 불렀다. 그러다가 삼동면 2대 면장을 지낸 김필두씨가 재직당시 김씨 면장 출신지라 하여 ‘금송(金松)’이라 부르게 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마을의 유래와 형성

삼동면 금송마을은 작전, 양지, 텃논, 세곡으로 불리는 4개 땅에 가장 큰마을 본동을 더해 주민들이 어우러져서 살아가고 있다. 금송은 마을 앞산의 생김 생김이 거문고 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금성(禁城)이라 불렀다. 그러다가 삼동면 2개 면장을 지낸 김필두 씨가 재직 당시 김 씨 면장 출신자라 하여 ‘금송 (禁松)’이라 부르게 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마을 공동어장에 바지락을 양식해 년 2500만 원의 소득을 올리지만 이익금 모두 마을 기금으로 돌려 농로 포장이나 안길포장 등 마을 일에 쓰고 있다.

축산이나 원예작물도 하지 않아 특별한 수입이 없는 마을, 그러나 금송은 그렇게 가난한 마을은 아니다. 금송마을은 까치발골을 들어 서자 집집마다 베짜는 소리가 들려온다. 마을의 80%가 넘는 집들이 사천에서 삼베를 받아와 일 년 내내 짬을 내어 부업을 하는 것이다. 굳은살이 박인 아낙네들의 손바닥이나 무릎을 보면 얼마나 오랜 세월 삶을 살아왔는지 알 수가 있다.

마을회관(055-867-3200)

전도마을

‘덴섬’ 전도리의 순우리말의 마을

금송마을을 지나 왼손편 쪽으로 반달모양으로 아우러진 이 마을은 옛날엔 섬이었다고 한다. 간척공사로 육지가 되었으며, 이 간척지를 염전으로 사용하여 소금을 생산했다고 한다.

마을의 유래와 형성

지금도 이 마을은 벼농사가 끝나면 마을 앞 논들은 다음 해 벼농사를 위하여 휴식을 취한다. 아마도 간척지라는 땅의 특성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진도마을 사람들은 이 염전에서 생산한 소금을 팔아 많은 돈을 벌었다. 그래서 주위에서 지금은 염전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지만 진도라는 마을 이름에서 옛날의 부유함을 엿볼 수 있다.

마을회관(055-867-0450)

둔촌마을

상납곡 보관창고 있어 ‘둔촌이라’ 하고...

삼동면 전도마을을 지나 유스호스텔 뒤쪽으로 '복병'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임진왜란 때 모래로 성을 쌓아 병사들이 잠복하여 왜적과 싸웠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마을의 유래와 형성

옛날 조정에 바치던 상납곡을 보관하던 창고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둔촌’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둔촌은 전쟁과 관계되는 이름이 많아 군사상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전도마을은 매년 방학이 시작되면 전생을 치른다. 유스호스텔 캠프에 많은 학생들이 오기 때문이다. 둔촌 앞바다의 모래 갯벌에서는 철새탐조여행도 할 수 있다.

마을회관(055-867-4361)

동천마을

다양한 작목반 구성, 농가부흥 꾀해
동천시장 옛날의 정겨운 추억 아련히...

삼동면 동천주민들은 시장통인 도가머리와 본 마을인 도림 (옛날에 복숭아 나무가 많았기 때문), 중매 등 세 땅으로 흩어져 살고 있다.

마을의 유래와 형성

마을이 띄엄띄엄 떨어져 있고 초계 최 씨, 경주 최 씨, 이 씨, 김 씨, 박 씨, 조 씨 등 다성 바지가 살지만 마을 역사나 단합과 협조는 무척 잘 된다. 마늘과 벼농사를 짓고 있어 농가 소득이 높지는 않아 소득을 올리기 위해 참다래 작목반을 비롯해 유자, 단감, 작목반을 만들었다. 동천은 예전에 화천마을과 금천, 양화금을 포함하고 있었다.

도가머리에는 봉화, 내산, 은전, 물건, 대지포, 금송 등 14개 마을 주민들이 이용하고 있는 마을금고와 신협이 있으며 물이 깨끗해 남해읍 주민까지 이용하고 있는 낙원탕이 있다. 또 이곳에서는 5일장인 동천시장이 이 곳에 선다. 인근주민들이 이용하는 시작은 옛날의 정겨운 모습과 아련한 추억이 아직 남아있으며 시끌벅적한 시장의 모습에서는 선조들의 체취를 물씬 느낄 수 있다.

마을회관(055-867-3708)

화천(花川)마을

꽃내, 화천 한문 표기로 화천(花川)이라고 한다.

옛날 어느 자그마한 마을앞 하천 주위에 참나무 잡목이 무성하고, 온갖 꽃들이 많이 피어 있었다. 그래서 이 동네뿐만 아니라 주위를 지나는 모든 이들이 그 마을을 꽃내라고 불렀다.

마을의 유래와 형성

꽃내, 화천 한문 표기로 화천(花川)이라고 한다. 꽃이 만발하고 마을 앞으로 내가 흐르고 정말 살기 좋은 동네가 아닐 수 없다. 1954년 동천1리로 되었지만 1979년 다시 화천으로 개칭되었다. 그러나 이 좋은 경관과 이름을 가진 동네도 그 옛날에는 체봉골(體奉谷)이었다고 한다. 체봉골 이름 그대로 옛날에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관속에 넣지 않고 거적때기를 엎어서 이곳에 방치하여 시체의 불순물이 모두 부패, 훼손된 후 뼈만 남았을 때 이를 수거하여 묘를 만들었다는 장소였다고 한다.

현재는 마을의 공동묘지로 사용하고 있는 곳으로 시체를 봉인했던 골이라 하여 체봉골이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마을이 이 이름처럼 흉흉하지는 않다. 아주 조용한 동네이다.

마을회관(055-867-0261)

금천(金川)마을

투망 한번에 은어 10마리 잡는 곳
은어 묵장어 노닐던 ‘꽃내’를 살리자.

금천마을을 가려면 군내에서 가장 이름이 예쁘다던 삼동면 꽃내마을에서 내려 비단길이 아름다운 금천을 건너야 한다.

마을의 유래와 형성

가구수 40호, 주민수 120명, 반농반어로 호망(주복), 유지망, 통발 등을 하며 강 씨, 김 씨 등이 얽혀 살아가는 삼동면 금천마을.
금천마을을 가려면 군내에서 가장 이름이 예쁘다는 삼동면 꽃내마을에서 내려 비단같이 아름다운 금천을 건너야 한다. 금천마을의 또 다른 이름은 노루목 또는 노리목이다. 주민들은 지형이 노루목처럼 생겼다 하여 ‘노루목’, 적을 노리던 곳이라 하여 ‘노리목’이라 전해 온다는데 인근 지명들의 유래를 유추해보면 노리목이 맞을 듯도 하다.

마을회관(055-867-0261)

양화금마을

금보다 귀한 인심이 넘치는 마을

삼동면 지족에서 동천으로 가다 보면 둔촌마을이 나타난다. 옛날에 버드나무가 많아, 가을이면 단풍이 곱고 버들꽃을 많이 땄다 하여 양화금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의 유래와 형성

이 마을 끝자락에 이르면 왼쪽으로 해관암, 노루목이란 팻말이 보인다. 노루목 마을로 접어들어 바다 건너 창선 장초와 통영 수유도, 사랑도를 보며 소나무 우거진 꼬부랑 고갯길을 오리쯤 가다 보면, 아이들 손바닥 오무린 것 같은 자그마한 포구가 나타난다. 언덕배기 비탈길을 내려서면 몽돌밭이 나타난다. 달팽이 산을 가운데로 왼쪽 선창가와 오른쪽 뱀봉 아래를 합쳐 양화금 마을이다. 옛날에 버드나무가 많아, 가을이면 단풍이 곱고 버들꽃을 많이 땄다 하여 양화금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양화금 사람들은 인정이 많기로 소문이 자자하다. 대부분 다른 마을은 피서객이나 낚시꾼들에게 입장료나 주차비를 받고 있지만 이 마을은 아직 돈을 받은 적이 없다. 오지 마을까지 사람들이 찾아오니 반갑기만 하다는 게 마을 사람들의 생각이다. 한 번은 피서객들이 논두렁에 볼일을 봐 눈물 보러 가던 사람이 인분을 밟고 넘어져 다치는 일까지 있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애지중지하는 몽돌이나 전복을 채취해가지만 않는다면 언제나 환영이라 한다. 물금산, 금마산, 잉금산, 기금산, 강난금산이라는 금자 5개가 붙은 산이 있어 금이 많을 것이라며 한때 채광꾼들이 몰려들기도 한 양화금은 금 부서러기 하나 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금보다 귀한 인심이 넘치는 마을이다.

마을회관(055-867-0261)

내동천마을

마음 어진 이들이 지키는 명당, ‘천옥지’
오백살 ‘당산나무’는 마을 지킴이

산으로 둘러싸여 바다가 보이지 않는 곡식들이 자라는 들판이 지긋이 내려다 보이는 곳,동천마을 안쪽에 있다하여 내동천이라 부르는 마을

마을의 유래와 형성

동천마을 안쪽에 있다 하여 내동천이라 부르는 마을. 그러나 주민들은 본디 동천이란 이름은 자연마을 도림(挑林)과 내동천을 일컫는 이름이라며, “지금의 동천리는 술도가가 있어 ‘도가머리’라 부르던 곳으로 상가가 형성되면서 중심지로 변모하자 1979년 동천리로 개칭됐다”라며 마을 이름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이 마을 전주이씨 종손인 이두원씨가 보존하고 있는 고종 황제 때의 호구단지(개인 호적)에도 주소가 동천(東川)으로 표기돼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내동천은 숙종 때 어떤 사건에 연루돼 아들만 업고 간신히 피신 온 전주 이씨가 처음 들어와 마을을 이루었다. 그로부터 350여 년이 지난 지금은 각성바지 58호에 148명의 주민들이 마늘농사, 논농사를 지으며 터전을 이어간다.
이 마을의 역사를 입증하듯 마을 들머리에 있는 둘레 8m의 거대한 당산나무는 속병이 들어 수술을 받은 몸으로도 “왜놈들이 총 개머리판 만들려고 가지를 베어 말에 메달아 끌고 가다 갑자기 피를 토하고 쓰려져 죽었다”는 내력처럼 신성한 수호신의 모습으로 서 있다.

마을회관(055-867-0244)